별것없는 일상
이렇게 빛이 나는 본문
소파 옆 내 허름한 서가에 이렇게 빛이 나는 한 권의 책이라니.
내 나라가 그 정도의 위상을 갖게 되었구나.
한 강 작가의 소설을 읽어보려 한 적이 있었다.
주문을 했다가 대강의 줄거리를 읽어보고는 취소해야 했다.
문체가 수려하고 남다른 깊이로 문제를 다루려니와
내 지극히 평범하고 얕은 소화력으로는 체해버릴 것 같은
너무 아픈 역사적 사건들이나 문명의 상식선을 벗어나버린 일들을 담고 있어서......
예전에 공지영작가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란 책을 뭣모르고 읽었다가
정신적 폭력을 당한것 같은 느낌이 왔던 기억에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다룬 책들은 포기해버리고 있다.
(그나저나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다.)
그래도 시는 읽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2018년에 올렸던 한 강 작가의 시 한 편 다시 올려본다.
서시
- 한강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 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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