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것없는 일상
시간과 공간을 건너 계속해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본문
몇 권을 읽었고 또 몇 권은 천천히 읽는 중이지만
아직까지 나는 한강작가의 모든 작품을 다 읽어볼 자신이 없다.
솔직히는 그 노골적인 고통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들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
적극적으로 정신적인 폭력을 당하고 그걸 시간을 들여 치유할 수 있을만큼
내 일상이 여유롭거나 평탄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에게도 내 온 신경을 집중 시켜야 할
중요하고 어쩌면 영원히 쉬워지지 않을 것 같은 일들이 매일같이 혹은 주기적으로 다가 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내 삶에 집중하기에도 버겁기 때문에 여유시간엔
지친 내 몸과 마음을 다독이고 일으켜세워 줄 수 있는 것들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강작가의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었고
어떤 땐 그 저의를 의심하기까지 했는데
어제, 노벨상 강연을 통해 그녀와 그녀의 작품들을 조금은 이해하게 된 것 같아 옮겨본다.
철학과 종교가 같은 선상에 놓인 두 지점인 것 처럼 어쩌면 작가의 역할이란 성직자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한강작가 노벨상 강연중에서. https://www.nobelprize.org/prizes/literature/2024/han/225027-nobel-lecture-korean/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자료를 읽을수록 이 질문들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는 듯했다. 인간성의 가장 어두운 부분들을 지속적으로 접하며, 오래 전에 금이 갔다고 생각했던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 마저 깨어지고 부서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쓰는 일을 더이상 진척할 수 없겠다고 거의 체념했을 때 한 젊은 야학 교사의 일기를 읽었다. 1980년 오월 당시 광주에서 군인들이 잠시 물러간 뒤 열흘 동안 이루어졌던 시민자치의 절대공동체에 참여했으며, 군인들이 되돌아오기로 예고된 새벽까지 도청 옆 YWCA에 남아 있다 살해되었던, 수줍은 성격의 조용한 사람이었다는 박용준은 마지막 밤에 이렇게 썼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 문장들을 읽은 순간, 이 소설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벼락처럼 알게 되었다. 두 개의 질문을 이렇게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
이 소설의 한국어 제목은 <소년이 온다>이다. ‘온다’는 ‘오다’라는 동사의 현재형이다. 너라고, 혹은 당신이라고 2인칭으로 불리는 순간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깨어난 소년이 혼의 걸음걸이로 현재를 향해 다가온다. 점점 더 가까이 걸어와 현재가 된다. 인간의 잔혹성과 존엄함이 극한의 형태로 동시에 존재했던 시공간을 광주라고 부를 때, 광주는 더이상 한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가 된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을 쓰는동안 알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 계속해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현재형이라는 것을.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노벨상 인터뷰중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EcynBYAmTK0
"맨몸으로 장갑차 앞에 서서 멈추려고 애를 쓰셨던 분들도 보았고
그리고 맨손으로 무장한 군인들을 껴안으면서 이제 제지하려고 하는 모습들도 보았고
또 총을 들고 다가오는 군인들 앞에서 버텨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모습도 봤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에 군인들이 물러갈 때는 잘 가라고 마치 아들들한테 하듯이 그렇게 소리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분들의 진심과 용기가 느껴졌던 순간이었습니다.
젊은 경찰분들 군인분들의 태도도 인상적이었는데요
그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뭔가 판단을 하려고 하고 어떤 내적 충돌을 느끼면서 최대한 소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런 명령을 내린 사람들 입장에서는 소극적인 것이었겠지만
보편적인 가치의 관점에서 본다면 생각하고 판단하고 고통을 느끼면서
해결책을 찾으려고 했던 적극적인 행위였다고 생각됩니다."